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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인사이트/아는 척 하기 좋은 역사

영화 헌트 보기 전 알고 가야 할 이야기, 아웅산 테러 사건

by 한숟갈 2022.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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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감독의 영화 '헌트'가 8월 10일 날 개봉을 합니다. 영화 '헌트'는 1980년대 5공화국 시절 배경으로, 대표적으로 전두환 아웅산 테러 사건 등을 재해석하여 스토리에 녹여냈다고 합니다. 헌트를 감상할 때 배경지식으로 알고 있으면 더욱 좋을 '아웅산 테러 사건'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영화-헌트-포스터
영화-헌트

 

유례없는 정부 관료 동시 사망, 아웅산 테러 사건

동남아 해외 순방기간,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 미얀마(그 당시는 버마). 부총리, 장관 및 수행원들이 아웅산 묘소에서의 행사를 위해 일제히 인야레이크 호텔에서 아웅산 묘소로 이동을 한다. 전두환 대통령보다 먼저 도착한 관료들과 수행원들은 원활한 행사 진행을 위해 동선을 맞춰보고 준비를 진행 중이다. 그런 사이, 전두환 대통령도 행사 참석을 위해 영빈관에서 출발하여 아웅산 묘소가 1.5km 정도 남았을 무렵이다. 10시 28분쯤, 행사장에서는 나팔수들이 리허설 삼아서 나팔을 잠깐씩 불어 본다. 바로 그때, 폭발이 발생했고 건물은 무너져 내린다.

아웅산테러
아웅산테러

건물에 깔려 이리저리 널려 있는 시신들과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그 순간 그 곳은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17명의 관료 및 수행원이 사망했고 14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정부 관료가 이렇게 한꺼번에 죽는 경우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전두환 대통령은 현장으로 가는 길에 소식을 들었고 그 길로 차를 돌려 떠났다. 사건 발생 6시간 정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전두환이 살아남은 것은 정말로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행사장에 가기 위해 타기로 했던 차가 고장이 발생하여 출발 시간이 지연된 것이다. 만약 차가 고장 나지 않아서 더 일찍 행사장에 도착했다면 전두환 대통령은 아마 그 현장에서 폭탄을 맞이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로 여기서 전두환 대통령이 죽었으면 더욱 일찍 민주화가 왔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많았다.

 

아웅산 테러가 전두환의 자작극이라는 음모론도 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테러 3년 전 광주에서의 학살 등 민심이 많이 좋지 못한 상태였다. 정권을 강화하고 지지를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집에 도둑이 들어오면 부부는 필연적으로 힘을 합치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대내적인 결집을 위해서 대외적으로 적을 만들거나 그 적에 대한 국민들의 공포를 이용한 경우는 굉장히 많다. 아웅산 테러도 바로 그런 관점에서 전두환이 혼란스러운 민심을 수습하고 대내적인 결집을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자작극이라는 말도 많았다.

그러나, 여러 정황과 증거들로 볼 때 북한 소행이 확실하다.

 

또 하나의 음모론 근거중에 하나는 해외 순방 스케줄에 없었던 미얀마(버마)를 전두환이 갑자기 스케줄에 끼워 넣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방문 계획조차 없던 미얀마를 굳이 전두환이 끼워 넣은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거기서 테러가 발생했으니 의심은 증폭되었다. 그러나 이 부분은 테러와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미얀마는 그 당시 네 윈이라는 사람이 30년 독재를 이어오고 있었다. 네 윈도 군인이었고 장기집권을 하고 있었기에 전두환 입장에서는 롤모델로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전두환 말로는 7년만 집권하고 물러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더 해 먹고 싶었을 것이고 그 비결을 배우고 싶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것도 직접적으로 딱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합리적인 추측인 것은 맞아 보인다. 

 

 

테러범, 그들은 누구인가?

테러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서 테러범 3명은 모조리 붙잡힌다. 1명의 이름은 강기철인데 강가에서 야밤에 헤엄치다가 붙잡혔는데 경찰과 대치 중 수류탄의 클립을 빼고 다가오면 터뜨리겠다며 위협했다. 근데 당황스럽게도 수류탄이 펑 터져버렸다. 수류탄 폭발로 인해 강기철은 손목이 날아갔고 눈 한쪽이 날아갔다. 그래서 결국 붙잡혔다. 

 

나머지 2명도 강가에서 결국 붙잡혀서 경찰서로 끌려갔다. 경찰서에서 2명이 가방에 있던 총으로 반항하다가 1명은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고 1명은 도망쳤다. 결국엔 붙잡혔는데 똑같이 수류탄으로 경찰들을 위협했다. 근데 당황스럽게도 터져버려서 혼자만 팔이 날아갔다. 그래서 결국 다시 붙잡혔다. 

 

수류탄이 왜이렇게 잘 터졌을까? 애초에 설계될 때 자폭용으로 설계되었던 것이다. 공작원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엔 테러에 쓰임만 당하고 북한 조국으로부터 버림받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안 북한 공작원 강기철은 결국 모든 것을 실토했다. 자신은 북한 특공부대 소속 육군 상위이고 상관으로부터 이 테러 작전을 명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면서 모든 사건의 전말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작전명 '늑대사냥'

한국도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실제로 평양에 특수부대를 보내 김일성을 사살하려는 계획도 있었지만 무력출동을 피하고 싶었던 전두환의 무마로 인해 실행이 안되었다. 결국  '늑대사냥'이라는 작전을 수행했다. 이름만 봐서는 군사적인 작전 같지만 외교적인 작전이었다. 북한을 늑대로 표현하고 그 늑대를 사냥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 각국에 대사를 파견하여 북한과 수교를 단절 및 축소를 해줄 것을 요구한다.

 

실제로 효과가 엄청나게 좋았다. 참고로 이 당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 대립이 심할 때라 타 국가와 수교관계를 북한보다 더 많이 맺는다는 것은 굉장히 이념적으로도 중요시 되었다. 60여 개국들이 북한과의 교류를 끊거나 축소하였고 그 과정에서 한국과 수교를 맺는 국가도 많았다. 그 이후 많은 국가들이 북한과의 교류에 더욱 신중해졌고 냉전 이후 북한이 고립되는 것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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